영화 명량의 결정적 장면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를 한다. 칠천량 해전 패배 이후, 처음으로 왜놈들이 전라도를 점령했다고 한다. 수군과 전선을 모두 잃은 조선 수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수군으로는 승산이 없으니 육군과 합류하자는 배설과 육군과의 합류를 반대하는 안위가 서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이런 상황에서 권율 장군은 수군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한다. 최종 결정을 해야 할 이순신은 고뇌한다. 한산도 대첩의 승리 같이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승리 이순신을 시기하는 세력의 모함을 받아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많이 쇄약 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칠천량 해전에서 목숨을 거둔 병사들이 이순신에게 보이고, 이순신은 미친 듯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고 걸어간다. 그 순간 배설 등 자객이 이순신을 암살하려 하지만 이순신은 암살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와 동시에 이순신은 거북선이 불타는 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한다. 의기양양한 왜놈들의 함성 소리가 조선군 진지에까지 들리자 조선군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다. 두려움에 흔들리는 일부 장수들까지 나서서 이순신에게 육군 합류를 권유한다. 그러자 이순신은 그들을 모두 밖으로 불러내서는 조선 수군이 사용하는 막사를 불태운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자신을 믿고 따라오라 연설을 한다. 명량 해전 당일, 이순신은 어머니의 위패에 절을 올리고 대장선 올라 명량으로 들어오는 구루시마 선봉 왜선 330척과 맞선다. 이순신은 주저하는 다른 배들에 본보기를 보이려 앞장서서 적에게 포격 가한다. 구루시마 진영의 2군이 올 때, 이순신의 대장선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그러자 이순신은 닻을 끊고 해류 영향이 적은 섬 근처로 배를 옮길 것을 명한다. 그러고는 초요기(장수들을 부르는 명령기)를 올린다. 그러나 아무도 대장선을 지원하러 오지 않는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구루시마는 이순신의 대장선에 붙일 것을 명령한다. 이후 조선 수군과 승병, 심지어 노를 젓던 민간인까지 판옥선에서 왜놈들과 백병전을 시작하게 된다. 이순신의 대장선이 포위되자 이순신은 포를 한 데 모아 터트리라 명령한다. 포의 충격으로 이순신의 대장선은 왜놈들의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한다. 때맞춰 안위의 배가 이순신의 대장선을 지원하게 위해 움직인다. 구경하던 다른 백성들의 신호로 중군장 김응함의 배가 포탄을 쏘아 왜놈들의 화약선이 대장선에 닿기 전에 터트린다. 이순신의 대장선이 멋지게 왜놈들을 방어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후방의 다른 조선 수군들을 하나둘씩 해전에 참전을 시작한다. 그러나 구루시마를 제외한 다른 왜놈들은 이순신의 용맹함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후 울돌목의 회오리 속으로 양측의 배가 휘말린다. 회오리에 휘말린 이순신의 대장선은 백성들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왜놈들은 회오리와 함께 피격당한다. 이 모습을 본 후방의 왜놈들은 퇴각한다.
영화 명량의 배경 지식
1592년(선조 25년) 5월 1일(음력 4월 13일에 왜놈들이 왜군 함대 700척 타고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이순신은 옥포에서 첫 승전을 알리게 된다. 이 해전이 옥포해전이다.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왜놈들을 크게 무찌른다. 이 전투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이다.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왜놈들에게 크게 패한다. 이 해전이 칠천량 해전이다.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왜놈들을 물리친다. 이것이 명량 해전이다. 명량 해전의 승리로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킨다.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일본군은 철수를 한다. 1598년 음력 11월 18일에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음력 11월 19일 새벽부터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54세.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었다.
감상평 및 추가 내용 정리
이 영화는 나라를 구한 장군의 이야기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영화를 보고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였는데 역사적 사실이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이 영화는 감상평보다는 역사적 내용을 좀 더 정리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임진왜란 초기에 공을 많이 세운 이순신은 여러 곳에서 모함을 듣게 된다. 모함을 받은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을 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원균의 통제로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인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이 해전에서 대패를 하게 된다. 다수의 수군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은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시킨다. 그러나 칠천량 패배 이후, 조선 수군 체계는 엉망이었다. 이순신은 1597년 9월 28일(음력 8월 18일) 회룡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하게 됐다. 나중에 또 1척이 김억추나 송여종의 지원으로 추가되어 13척이 되었다. 이 13척이 조선 수군이 가지고 있는 전선의 전부였다. 칠천량 패전의 손실이 커서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린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명량 해전(명량 대첩)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함선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함선 330여 척을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퇴했던 해전이다. 울돌목(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범위가 좁다. 밀물 때는 넓은 남해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빠른 조류가 흘렀다. 또 울돌목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이런 지형의 이점을 전투에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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